이 변명은 다른 생명의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주장은 잘못된 이분법을 제시합니다. 이 주장이 제기하는 이분법은 1) 인간이 출산 (혹은 더 많이 출산) 하지 않으면 2) 야생동물이 겪는 고통의 범위(그리고 아마도 강도 또한)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 두 가지 가능성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논의를 위해서 인간 활동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인간 및 비인간 동물의) 고통이 통제되고 더 적은 고통이 발생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물론 항상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봅시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 활동에 따른 고통의 절감이 필연적으로 출생으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기술 능력과 지식 저장량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야생동물의 고통을 없앤다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인간의 육체가 수단으로써 필요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참고: 야생동물의 고통(혹은 다른 형태의 고통)을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과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현저히 적은 숫자의 개체로 인류가 지속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관한 논의가 반출생주의자들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커뮤니티와) 현재 진행 중입니다. 현저히 적은 숫자로 인류가 지속되는 이러한 궁극적인 상황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출생이 필수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무분별한 수준에 미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출생률이 극도로 낮아지는 상황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출산을 옹호하는 논거로써 적절하지 않습니다.
둘째, 야생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출생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이는 너무 거칠고 투박한 수단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발생하는 고통에다가 그 인간이 의도적으로 다른 동물에 가하는 불필요한 고통을 더한 다음, 그 인간 본인이 겪는 고통까지 고려했을 때, 출생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는 너무 우회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유정적이지 않은 유기체나, 도구, 혹은 사물을 이용하는 것이 유정적 존재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방법으로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비록 현재 우리가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출생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그러한 역량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 지점에 관해 마지막으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든 유정적 존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해야 하며, 일반적으로 권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변명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야생동물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적은 지역에는 이 변명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막, 남극 혹은 우주와 같이) 유정적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역에 정착지를 설립하는 것은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인 고통 절감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착지는 원래 고통이 없던 곳에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거나, 고통이 적었던 곳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