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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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닌 동물은 출생하는데 우리는 왜 하면 안 되나요? 출생은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이 변명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하, 동물)이 출생한다는 점을 들며, 인간 역시 동물이기 때문에 출생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동물이 어떤 행동 X를 한다면, 인간 역시 그 행동 X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의 심각한 결함은 동물이 하는 행동 중에 영아살해나 강간 등, 사람들이 비난하는 행위도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행동 중에는 협력이나 나눔과 같이 인간에 맥락을 적용했을 때 허용되는 행동이 있는가 하면 앞서 언급된 것과 같이 허용되지 않는 행동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여부는 인간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동물 행동 중 몇 가지만 골라서 인간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으면서, 동물 행동 중 비난받을 만할 다른 행동은 무시하는 것은 '체리피킹'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맥락에서 허용되는 동물의 행동과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구별한다는 점 자체가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이 동물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과 분명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기준을 사용하지 않나요?

출생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 주장은 동일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생은 실제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인간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 선한 일(예: 이타주의, 협동, 동정심)은 물론 악한 일(예: 영아 살해, 강간, 산 채로 누군가를 먹는 행위)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자연적이라는 점을 이용하여서는 그 행동이 선하다거나 혹은 악하다는 것을 논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잘못된 논증을 '자연에의 호소' 오류라고 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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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출생하지 않으면 인류는 결국 멸종할 거예요. 그러므로 인류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출생해야 해요!

이 변명이 나오면, 논의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 논의의 주제는 '인류가 멸종하는 것이 윤리적인가'가 됩니다.

야생동물의 고통을 해결하기 전에 인간이 멸종하는 것이 윤리적인가에 대해 흥미로운 논의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멸종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멸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인 관점이 아닌 집단주의적이고 감성적인 관점에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특별한 자질이 있다. 따라서 개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을 멸종시켜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멸종에 반대하곤 합니다.  역사를 통해 보아 왔듯이,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종종 극악무도한 도덕적 참극을 야기했습니다. 출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인간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개인이 출생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것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멸종이 일어난다면 정말로 그것이 문제일까?"와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멸종에 관한 논의는 흥미롭지만, 결국은 대화 상대방의 통제하에 있는 것, 즉 자기 행동에 관한 것으로 대화를 되돌리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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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출생할 테니까 나 혼자 그만둔대도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출생하는 편이 낫겠어요.

물론 한 사람이 출생하지 않는다고 해도 새로 태어나는 인간의 수가 급격히 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지 여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행동을 하느냐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건 간에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식의 논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을 식용으로 살상하는 행위도 정당화해야 합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 모두 하는 일이니까 나 역시 동물을 도살하고 그 시체를 먹는 데 돈을 지불하는 편이 낫겠다. 내가 안 한대도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총 수는 줄어들지는 않을 것 아닌가.’ 무엇이 문제인지 보이시나요?!

이러한 주장의 목적은, 단지 주위 사람들이 어떤 행동에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을 면하겠다는 것입니다. ‘군중 속에 녹아들기’를 선택한다고 했을 때, 이러한 도덕적 무관심이 단순히 나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타인에게도 영향을 주고, 타인이 피해를 당할 때 우리가 고개를 돌린다고 해도 그 피해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함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종보다 선악을 잘 이해하는 종, 즉 가장 지적인 종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모두가 그렇게 한다’는 사실에 호소하면서 자기 자신이 그 문제를 조장한다는 점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면 무엇이 도덕적 해이인지 모르겠습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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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 기관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출생해야 해요.

우리에게 생식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번식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어떠한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해부학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 중에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혐오스럽게 여기는 행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는지 여부를 떠나 그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다른 신체는 여러 기능이 있으니 우리가 선택해서 사용하지만 생식 기관은 오직 한 가지 용도밖에 없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입니다. 따라서 생식 기관을 출생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장기의 기능이 하나이건 여럿이건 그 기능을 반드시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사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는 아기를 낳는 것이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어날 아기가 유전적 질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짧은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출생을 하지 말아야 할 상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은, 생식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출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생식 기관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출생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출생은 정당화됩니다. (출생주의적 기준에서도)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살게 되는 아기를 낳는 것을 포함해서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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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종교에서는 출생해도 괜찮다고 해요.

많은 사람이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강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어떻게든 타인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관철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약간만 숙고하면 결국 이 생각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은 자기중심적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종교에서 허용한다는 것을 이유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마찬가지로 타인 역시 자기 종교에서 허용된다는 이유로 특정 행동을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컨대, 동성애를 금지하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애자를 처벌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에서 동성애 혐오가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로 동성애 혐오자(즉, 자신들)를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이 변명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변명을 사용할 매력이 줄어든다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타인이 관여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종교적 신념은 도덕적 정당화 수단으로 유효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타인이 관여되는 그 행동을 자기 자신이 당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으로 출생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을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출생이란 곧 누군가를 전쟁터로 내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출생 옹호자가 지옥의 개념을 믿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은 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이것이 타인에게 그 위험을 강요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종교적 이유로 다른 사람이 위험을 겪을 상황을 야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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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출생을 멈춘다면 마지막 세대는 누가 돌보고 부양하나요? 노년층을 돌보기 위한 세대가 필요해요.

이것은 흥미로운 변명입니다. 비록 이것이 출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해결해야 할 정당한 문제를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것이 출생을 정당화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단순히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용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존재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에는 출생주의자들도 대체로 반대할 것입니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기존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목적으로도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이 정당화될 것입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여러 행위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공장과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낳아 사육하자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정직한 사람들은 이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고, 이러한 방식 대신 인생은 완벽하지 않으며, (노화와 같은) 장애물을 최선을 다해 극복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장애물 극복을 위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 존재하는 노예가 아닙니다.

참고: 이 원칙의 예외로서, 야생동물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인류를 지속해야 하므로 출생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은 ‘노년층을 돌보기 위해’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상황과는 중요한 지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즉, 동물 고통의 경감을 위한 출생이라는 해결책은 동물 고통 문제 그 자체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사람을 낳고 사육하는 것은, 다시 같은 문제를 야기하는 근원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 세대가 노령층이 되었을 때 이 세대를 부양하는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솔직히, 우리가 아는 한 이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일단 출생을 종용하는 시스템을 중단하고 나면, 노령층을 부양하는 시스템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이동할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노령층을 부양할 방식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입니다. 사회가 작아지는 와중에도 최대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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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고통이 너무 많아서 제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요.

이러한 변명을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세상에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이 있기 때문에 설사 출생 때문에 새 고통이 더해진다고 하여도 생명이 주는 기쁨과 성취감을 ‘희생’해야 할 정도로 그 고통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즉, 낳음을 당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은 ‘바닷속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개인이 저지를 수 있는 사실상 모든 부도덕한 행위를 ‘바닷속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는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타인의 집을 불태우더라도 동일한 논증을 사용하여 이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집이 불에 타서 생기는 고통은 세상의 고통에 비하면 바닷속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개별적인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논증은 본질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각자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출생의 문제뿐만 아니라 어떠한 행위에서든, 한 개인의 행위가 막대한 고통과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을 예로 들어보면, 출생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그 특정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수백 명(어쩌면 그 이상)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는 가능성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볍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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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낳은 아이가 암 치료법을 찾거나 다른 위대한 일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이 변명에 대답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 아이가 태어나서 해결할 그 문제라는 것이 애초에 생명이 존재하기에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불타는 집에 마른 장작을 집어넣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날 아이가 암을 치료할 가능성보다 그 아이가 암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이런 문제가 가득한 세상 속으로 더 많은 사람을 몰아넣는 것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에 더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요? 애초에 사람을 고통의 길로 몰아넣고서는 그들이 겪을 고통의 양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처음부터 사람들을 고통의 길로 몰아넣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 태어난 아이가 암 치료법을 찾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게나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연쇄 살인범이 되거나 테러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만들 때 이 점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변명은 ‘내 아이가 암을 치료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의 틀 안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태어날 아이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극악무도한 일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내가 낳을 아이가 암 치료법을 찾을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내가 낳을 아이가 암 치료법을 찾을 수도 있고, 비행기를 빌딩에 박을 수도 있고,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 는 식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단순히 타인의 선택에 대해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장밋빛으로만 보는 순진함을 꼬집는 것입니다.

  • 당신이 제공해 주는 환경으로 자라나는 자녀는 암의 치료법을 찾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차라리 입양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기회의 부족이나 지원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사람을 입양하세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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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에 나를 부양해 줄 가족이 없으면 외롭고 힘들어질 것이에요.

이러한 변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이듦에 따른 고통과 고독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사람을 존재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출생을 정당화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단순히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용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존재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에는 출생주의자들도 대체로 반대할 것입니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기존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목적으로도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이 정당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공장과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낳아 사육하자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정직한 사람들은 이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 존재하는 노예가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인생은 완벽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아래와 같이 생명을 착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필요를 충족해 나갈 방법을 찾거나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나이 들어도 경험을 나눌 수 있도록 합니다.

  • 노인에게 커뮤니티/돌봄을 제공하는 기존 기관을 찾습니다.

  • 절박한 상황에 처해 보살핌이 필요한 인간이 아닌 동물을 입양하고, 입양에 대한 덤으로써 정서적 지지를 해줄 수 있는 동료를 얻었음에 감사합니다.

  • 절박한 상황에 처해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을 입양합니다. 미래에 그 피입양자가 은혜를 갚고 당신의 필요에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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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갖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아이가 없으면 내 인생이 무의미해요.

어떤 지점에서 이러한 변명을 주장하게 되는 것인지 납득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선천적인 번식의 본능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생물학적 욕구에 따라서 삶을 영위하고, 이는 번식을 하고 (생물학적)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것은 출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타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 타인이 존재건 비존재건 건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의미를 자족(타인의 행동에 의존하지 않음)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무언가로부터 의미를 도출해낸다는 것이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연쇄 살인범은 피해자를 죽이는 데서 의미를 찾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연쇄살인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논리에도 불구하고 해당 변명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입양입니다. 전 세계에는 수백만 명의 고아들이 있고, 그중 하나를 입양하여 기르는 것은 출생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부여해 줄 것입니다. 다만 이때의 입양은 입양하는 사람의 만족이 아니라 피입양되는 사람의 필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대안은 강력한 커뮤니티 활동이나 열정을 쏟을 만한 대의를 찾는 것입니다. 주변 커뮤니티나 대의명분이 있으면, 커뮤니티 구성원과의 교류 및 관계, 또는 대의를 위한 성과 창출로부터 의미를 찾을 수 있으므로 출생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거나 심지어 제거할 수 있습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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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에게 비교적 고통이 적은 좋은 삶을 줄 수 있으니까 낳아도 될 것 같아요.

이 변명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이 풍요로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인간이 아닌 동물은 말할 것 없이)이 겪는 고통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누군가를 태어나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 새로운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현재 우리의 존재 상태에서는 살 가치가 없는 인생으로 태어날 될 위험이 늘 존재합니다. 심한 우울증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만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성 질환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풍요는 위험을 어느 정도 줄일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위험을 아예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무리 적더라도, 태어남을 당하는 사람의 인생이 살 만하지 않을 위험이 있거나 그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다른 사람이 그러한 위험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 위험을 부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모든 생명은 존재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이 없습니다. 비존재는 존재하고자 하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필요의 연속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필요 중 많은 것은 우리가 능력 범위 내에서 충족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필요를 창출해낸다는 것은 완전히 비논리적입니다. 특히 인간이 이러한 필요를 불충분하게만 충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또한 이러한 변명은 누군가의 안위에 타인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강간범, 살인자, 테러리스트 등이 가득합니다. 누군가에게 존재를 강요하는 것은 단순히 주사위를 굴리면서 행운을 비는 순진한 생각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태어나는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태어난 사람이 학교 총격범이나 연쇄 강간범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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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혁신을 통해 존재에 수반한 고통이 사라질 거예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는 것 맞죠?

물론 언젠가는 존재에 수반한 고통을 제거할 수단이 발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킬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존재로부터 고통을 제거하는 기술혁신을 인류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애초에 그것이 가능한지도 알 수 없지만, 본 논의를 위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 인간의 고통을 근절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을 기울여야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래 인간의 고통은 그들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생명으로 밀어 넣고 그 과정에서 해악을 끼친 이후에, 이렇게 존재하게 된 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애초에 해악의 길로 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낳지 않으면서, 새 생명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기울일 노력을 기존 존재들의 고통을 경감하는 데 쏟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윤리적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와 그 고통이 사라진 세대 사이에 중간 세대가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고통이 없는 시대 그 사이를 잇기 위해서 그 가운데 세대들에서는 수십억 명이 낳음을 당하는 해악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기 위해서 사람들이 중세 영국에 낳음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이 공정한가요? 우리가 어떻게 감히 존재하지도 않는 세대들의 고통(그 고통 자체가 애초에 존재함으로 인해 탄생합니다)을 제거하겠다는 명분으로 다른 생명을 해악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들을 존재하게 하고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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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항상 생명을 낳아왔어요. 그것이 정상이고 항상 그래왔어요.

인류는 항상 생명을 낳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태껏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왔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그래도 된다는 정당성을 주는 것일까요? 우리가 항상 무엇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이라거나 계속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류는 사소한 이유로 서로를 죽여왔지만, 이 사실을 들면서 오늘날 우리도 사소한 이유로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정당화할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출생이 정상이라는 주장에 대해 말해봅시다. 출생은 정상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행동을 정상이라고 규정하고, 또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사회적 낙인을 찍는다고 하여도, 그 행동이 도덕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것은 순응이지 윤리가 아닙니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은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단순히 다수가 받아들인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거나 잘못이 옳음이 되거나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노예 제도가 오늘날에도 일부 존속하고 있지만, 그것이 도덕적 규범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윤리적인 이유로 압도적인 대다수가 노예 제도를 비도덕적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한때 모든 사회에서 노예제가 정상이었던 적도 있었고, 당시 노예제는 대체로 대규모로 자행되었습니다. 오늘날 비도덕적 행위라고 우리 모두가 규탄하는 것들도 한때는 정상이라고 불렸습니다. 정상이라고 불리는 부도덕한 행위를 찾아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의무입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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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만 낳는 것으로 반출생주의에 대한 제 몫을 다할 거예요. 서너 명 낳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아이를 한 명 낳느냐 많이 낳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 명의 자녀만 갖는 것은 2명, 7명, 혹은 10명의 자녀를 갖는 것보다는 비윤리적이지는 않지만, 그것 역시 한 명을 낳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출생의 도덕적 옳고 그름은 당신이 낳을 수 있는 어떤 가상의 잠재적 자녀수에 비례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한 명만 낳을 계획이었든 15명을 낳을 계획이었든, 각 자녀를 낳는 것의 윤리적 문제는 동일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소소한 만족을 위해 한 어린이를 폭행한 후 ‘그래도 난 15명의 어린이를 폭행한 것은 아니다’라고 정당화한다면 그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잠재적으로 얼마나 나쁜 일을 여러 번 할 수 있느냐와 상관없이 각각의 나쁜 일이 개별적으로 평가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 변명은 아마도 (변명의 주창자와 내가 잘 모르는 사람 사이의) 어떠한 합리적인 타협안으로서 제시된 것으로 보이지만, 물론 그렇게는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아이 한 명을 낳는 것이 단순히 그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한 명의 출생은 수백 대에 달하는 출생의 가능성을 열 수 있고, 이는 수 천 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각의 태어나는 생명은 존재를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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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이기적이에요. 분명 살아있는 것이 기쁘실텐데 왜 다른 이에게는 이 기쁨의 기회를 빼앗나요?

반출생이 곧 생명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저 멀리 어디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태어나고 싶다고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무언가를 박탈당할 수 있나요? 박탈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출산이야말로 이기적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출산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존재는 존재하게 됨으로써 어떠한 이익도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출산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해악의 길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필요를 충족시키고 위험을 피해야 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자격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명백히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이 변명이 논리적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나 살펴봅시다. 만약 출생하지 않음으로써 진정으로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있으며, 누군가가 존재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면, 분명 우리는 최대한 많은 자녀를 (혹은 우리의 자원 수준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자녀를) 낳아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는 것인가요? 

당신이나 제가 지금 살아 있음에 기뻐한다는 사실은 생존을 지속하기를 원하는 (그리고 진화론적 의미에서 출생하기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욕구와 운 좋게도 지금 (상대적으로 말해서) 충분히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복합된 결과일 것입니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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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염세적인 관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삶의 좋은 면을 보세요.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러한 변명은 반출생에 대한 논쟁을 피하면서 당신이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편향(유전적 오류 등에 의한)으로 초점을 옮겨버립니다. 어떠한 주장을 고려할 때는, 그 주장을 제기하는 주장자가 가지는 편향과 관계없이 주장 그 자체의 장단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 주장이 편향에 의해 잘못 주장된 것일 경우, 그 주장을 직접 고려하는 과정에서 어차피 편향성이 드러날 것입니다.

출생은 말 그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강요하는 것(즉, 자녀가 자신보다 덜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고 태어나면 부모가 자신의 낙관론을 강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단 차치하고 당장은 이 변명 그 자체를 고려해봅시다. ‘삶의 좋은 면을 보라’는 부분은 반출생주의자들이 삶의 즐거운 경험(혹은 ‘좋은’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 것이자 만약 반출생주의자들이 즐거운 면을 고려한다면 삶이 그닥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고 결론 지을 것이라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명은 핵심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습니다. 예, 우리는 인생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사위를 굴리게 만들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즉, 태어남으로써 얻는 이득은 없음) 그러합니다. 단순히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해서 누군가를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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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렇게 나쁘다면 왜 자살하지 않는 거죠?

이 변명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존재의 시작을 방지하는 것과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멈추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가 존재하게 되면 아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일단 존재하게 된 이상 그 생명에게는 이해관계가 있고 선호가 있고 주관적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태어난 생명의 행복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의 존재가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능한 한 그들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인생이 견딜 수 없어서 차라리 우아하게 세상을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죽음을 원하는 지점에 와버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당연하게도 (단순히 삶을 지속하고 싶다는 것 이외에도)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반출생주의자들도 삶을 지속하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반출생주의 윤리에 대한 인식을 전파하기 위해서나 인간 외 동물이 가지는 윤리적 권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것 등입니다.

별개의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이러한 변명이 존재한다는 점 자체가 출생주의의 비도덕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래와 같은 유사한 상황입니다.

어느 날 밤 집으로 걸어가는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차를 세우고는 당신을 차 뒤에 태워 고속도로를 질주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겁에 질린 채 고통스러워하며 그들에게 "왜 이러세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라고 애원합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이게 싫어? 자동차 문 안 잠갔으니까 뛰어내리고 싶으면 뛰어내리든지. 하지만 우리가 널 납치했다고 비난하지는 마. 여기 있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잖아. 저기 문이 있고 만약 우리가 너에게 한 행위가 그렇게 악하다면 그냥 문을 열고 뛰어내리렴.”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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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신념을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아이를 낳을지는 제 개인적 선택입니다.

이 변명은 흥미롭습니다. 놀이터에 가서 어린이를 폭행하든, 육식을 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동물을 학살하든 이론적으로는 개인적 선택이듯, 아이를 낳을지 말지도 개인적인 선택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그 행동이 윤리적인지, 다시 말해서 그런 행동을 해도 되는지의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변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도덕의 영역 밖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개인적 선택이고, 어떤 시를 읽을 것인지도 개인적 선택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인 판단의 영역이 아닙니다. 반면 아이를 낳을지 여부는 이런 것들과 달리 단순히 개인적 선호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 선택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출생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걸고 도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덕적 판단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제 개인적 선택이에요’라고 말하면서, 개인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을 책임이 있습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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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게 된 아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데 대해 감사할 거예요.

이러한 변명을 들었을 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보충 질문을 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어떤 아이들이요? 성매매를 당하는 아이들? 테러 공격으로 몸이 찢긴 아이들? 어린 나이에 차에 치이고 그 후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는 아이들? 우울증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은 이 모든 위험의 전쟁터로 그들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물론 고통의 총알을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러한 질병과 공포를 완화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어떤 생명을 고통의 상황으로 밀어 넣을 권한을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끔찍한 퇴행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날 확률이 극히 적다고 해도, 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나요? 이미 존재하여 입양이 필요한 아이들이 너무나 많은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하겠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아이들의 행복을 걸고 도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이들이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우리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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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생명에 대해 반출생주의니 뭐니 논쟁하기보다는 차라리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시간을 쓰는 편이 낫습니다.

기존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노력은 매우 합당한 대의명분이며,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계속 더 많은 존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불러오는 도덕적 비상사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양측 사안 모두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문제 중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해결하고자 노력하시되, 그저 자녀를 낳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자녀를 갖도록 권유하지 마세요.

생각해보면, 아이를 낳지 않을 경우 당신이 선택한 문제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쏟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출생하지 않으면 기근, 가뭄, 질병 등의 재난과 건강 쇠퇴를 경험해야 하는 인간 및 비인간의 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태어나는 사람의 수를 줄이게 되면,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쓸 수 있는 자원을 일반적으로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자원의 ‘경쟁자’가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가 돕고자 하는 기존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우리까지 더 많은 자원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출생주의를 따른다면 이 자원들은 통째로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소비되어 버립니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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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대화를 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

예리한 관찰입니다! 정말 누군가의 부모가 낳아주지 않았다면 대화의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들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그들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모의 결정이 도덕적이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하등의 관련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출생주의가 정상이고, 비판 없이 출생주의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진화적으로 번식으로의 편향을 가지기 때문에, 어떠한 부모가 의심 없이 출생주의의 길을 걸어갔다고 해도 그 결과 태어난 개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인 것은, 이 비판에 대답하고 있는 사람이 기왕에 지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반출생주의 도덕에 대한 대화를 최대한 많이 하는 것(혹은 다른 형태의 반출생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이는 나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자는 의미입니다.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과의 대화가 그런 노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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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주관적이에요. 당신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녀에게는 고통이 아닐 수도 있어요.

크게 보았을 때 이것은 출생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현실적 근거도 없이 주장을 내세우는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희귀한 유전적 이상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 더 나아가 모든 동물은 동일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유사한 방식으로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녀들만 어떤 이유로든 우리와 아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경험, 연구 및 지식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려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들의 자손의 신경계가 해부학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거나 혹은 신경계가 아닌 다른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출생주의자의 자녀든 혹은 그 어떤 새로운 생명이든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리라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을 때 그 존재가 유의미하게 다른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모종의 새로운 해부학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다른 종류의 고통을 생성하거나 혹은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리라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증거는 새로운 생명도 말 그대로 다른 모든 이들과 똑같은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나고 우리 모두와 동일한 방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감정적 기질이 다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근본적인 지점들을 공유합니다. 즉, 내 손이 잘려 나가면… 그것을 느낄 것이고 아프리라는 것 말입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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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뭔데 제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예요?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것은 도덕적 문제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적반하장의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때나 자기 행동이나 신념을 정당화해야 할 때 면피 수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살인자나 강간범 아니면 아동학대범도 똑같이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윤리적 신념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신념을 가진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이유는 합리적 논증과 실증적 증거에 기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윤리적 신념은 무시되거나 거부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명을 들었을 때 재빨리 대화를 핵심 문제로 되돌려서,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더 많은 반박 논리와 반출생주의 윤리에 노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화를 다시 궤도에 올릴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하려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해 당신이 접해보지 못한 생각 방법을 알려주려는 것뿐입니다. 불편하게 들리실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제가 대화를 나누어 본 대부분의 사람은 반출생주의를 아주 이질적인 생각이라고 느꼈지만, 시간을 두고 숙고한 후에는 그것이 말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출생주의의 여러 측면 중 지금 가장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 시점쯤 되면, 당신은 대화 상대방이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더 많은 대화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24

하지만 당신도 그저 환생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개인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렇다면 일단 논쟁을 하기 위해서 윤회설이 실제로 사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윤회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서, 우리는 한 생명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문제에 무관심할 수 있나요?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행복은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생명은 태어나기를 선택할 수 없고, 다른 이에 의해 출생을 강요받은 결과 아주 단명하거나 견딜 수 없는 고통만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윤회의 틀 안에서도 우리는 생명이라는 감각의 그릇을 삶의 고기 분쇄기에 몰아넣는 행위를 당연히 최대한 줄이고 싶어합니다. 존재로 다시 내몰리는 환생의 수가 줄어들수록 아동 학대나 중증 장애 혹은 어린 나이에 굶어 죽는 것 등의 피해자도 줄어듭니다.

투팍 샤쿠르(Tupac Shakur)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유일한 이유는 환생할까봐이다.”

투팍이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반출생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인용구는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누가 끊임없이 존재로 내던져져서 매번 총알받이로 끌려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총알이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우리는 총알받이 내몰기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며, 이렇게 하면 총알이 누군가를 맞출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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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에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은 반출생주의 철학 그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생명과 유정성을 가진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존재는 위험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함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낙관주의적 편견에 눈이 멀어서 새로운 생명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위험(예를 들어 전쟁, 질병, 강간 등)을 가중하는 것이자, 태어날 존재를 이러한 위험에 노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위험에 노출될 사람이 없었다면, 그것은 위험이 아닙니다!

물론, 인류는 악의를 실행하기 위해 철학을 왜곡하고 조작할 수 있고 반출생주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철학 자체가 범죄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보면 억압과 폭력을 요건으로 하거나, 심지어 옹호하지 않는 원칙과 철학에 기반하였더라도, 의도의 선악과 상관없이 무언가가 엄청난 고통을 초래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원칙을 예로 들어봅시다. 대다수 사람은 이 원칙을 성별, 인종, 국적 등 자의적인 특성과 관계없이 모든 이가 법 앞에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전체주의 정당이 이 원칙을 왜곡함으로써 경과를 평등을 강제하고자 시도한 사례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극도로 억압적인 체제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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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 낸 세상에 있는 모든 예술과 아름다운 것들은 어떻게 되나요? 이것들이 모두 사라질 거예요!

인간은 웅장한 건축물, 예술작품, 음악 그리고 문학을 창조했고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름다움이란 인간이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특정 소리, 맛, 느낌 그리고 광경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만끽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죽고 나면 이 사물들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지 않습니다. 태어나기 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엄청난 작품들을 감상할 이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손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아름다움을 맛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고, 나중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손해를 입는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 멀리 어딘가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이 존재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누리지 못한 아름다운 사물들 때문에 매 순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은 그저 존재하지 않을 뿐입니다.

또한, 인간이 창조한 모든 악에 대해서도 생각하십시오. 가스실, 폭탄, 총알, 칼, 노예선 등의 악 역시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들입니다. 예술작품의 보존보다 이런 나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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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뭔가 문제가 있어요. 같이 아이를 낳을 상대를 못 찾아서 질투하는 것 아닌가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신공격에 가깝지만, 이런 변명을 하는 사람은 반출생주의 윤리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고 어떻게든 반출생주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반출생주의자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데이트, 연애, 성적 관계에 있어 능력이나 취향이 서로 크게 다릅니다. 출생주의자 중에도 인셀(의도치 않게 금욕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출생주의자 중에도 연애에 완전히 능숙한 플레이어(연애의 마술사)가 있습니다. 비록 무의식적이었겠지만 이와 같은 인신공격의 저의는 당면한 도덕적 문제에서 초점을 돌려서 반출생주의 주창자 개인의 ‘미숙함’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주장을 지적으로 마주하면서 반박하기보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려는 시도입니다. 이와 같은 변명은 예측 가능한 반응이며, 다음과 같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명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진리는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에서는 조롱거리가 된다. 두 번째에서는 맹렬하게 부정된다. 마지막에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명언은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의 반응을 문맥에 따라 설명하는 흥미로운 인용문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당신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변명’은 궤변이자 인신공격에 불과합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 변명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대화를 생산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 이때 약간의 자학 개그를 (혹은 대화 상대방과 친한 사이일 경우 대화 상대방을 비하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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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아기들은 너무 귀엽지 않나요? 아기들은 사랑스러워요!

맞습니다. 인류는 어린아이들을 (대부분) 귀엽게 여기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이는 성인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무리 귀엽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의 부속품으로써 존재하는 단순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귀엽고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들고 내면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귀여움은 피상적인 요소이므로 본질적인 도덕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새로운 유정적 존재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을 요구하는지 스스로 윤리적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귀여움은 이것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출생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많은 반출생주의자는 당연히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이 행복한 인생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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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아기들을 싫어하는 것 아닌가요?

출생에 반대한다고 해서 아기를 혐오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아기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러한 사람 중 일부가 반출생주의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을 폭행하거나, 아이들을 사고팔거나, 혹은 폭탄을 터뜨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이 모두 반출생주의자일까요? 아니면  그들 중 대다수가 반출생주의자인 걸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반출생주의자는 아이들을 사랑할 수도 있고, 어떤 반출생주의자는 아이들을 싫어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싫어하는지에 따라서 출생에 대한 도덕적 입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반출생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부모가 아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도박하거나 부모가 아이를 위험의 전쟁터로 몰아넣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 아이가 노출되는 위험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학대들을 모두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때, 태어나는 생명의 미래 복지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해서 출생이 윤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출생은 항상 비윤리적입니다.) 반출생주의자들은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자 무고한 생명을 가지고 도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반출생주의자가 정말로 아이를 미워한다면, 아이를 생명의 사선으로 내몰고 싶어하고, 아이가 고통스러워할수록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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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요. 반출생주의자들이 죽고 나면 반출생주의도 사라질 테니까요.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혹은 적어도 절반쯤 가정하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윤리적 원칙이 유전적 혈통을 통해서만 계승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가정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틀린 생각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가치관과 원칙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계승된다는 (비록 항상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점입니다. 그렇지만 부모 자식 간 계승이 가치관이나 원칙 혹은 윤리적 신념이 채택되는 가장 효율적이거나 가장 흔한 기제인 것은 아닙니다. 가치관, 원칙 그리고 신념이 주로 전파되거나 채택되는 방식은 경험이나 논리적 토론 혹은 새로운 정보에 대한 노출(특히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입니다. 동물권 운동을 예로 들어보면, 동물권 운동에 참여하는 대다수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대화하거나 혹은 경험을 통해서 동물권의 정당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며, 동물권을 지지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동물권 운동을 하게 되었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맞습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시민권 운동, 그리고 동물권 운동과 같은 정의를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생물학적 자녀를 낳음으로써 그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서서히 전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출생주의자들도 입양을 통해 아이를 양육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자녀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기 위해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부모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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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데에는 그 생명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아요. 동의를 하거나 동의를 철회할 주체가 없잖아요.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혹은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선례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완전히 불필요한 행동이 타인에게 명시적이고 직접적이며 중대한 영향을 미치더라도,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변명이 주장하는 바는, 동의를 구할 방도가 없으면 동의를 구할 의무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출생 행위를 동의의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가 출산하지 않으면, 출산했으면 태어났을 자는 존재함으로 인해 겪게 됐을 해악의 리스크를 완전히 면합니다. 반면 누군가가 출산하면 이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생명은 상당한 (많은 경우 본인이나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해악을 경험할 리스크에 노출됩니다. 이미 태어나버린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중단하기 (리스크 지기를 사절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막대한 비용(자살을 의미. 대부분의 경우 안락사가 선택할 수 없음)을 지불해야 합니다. 타인을 존재하게 만드는 데 대하여 동의를 얻을 수 없는 경우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주체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함), 우리는 위험의 리스크를 강요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출산하지 않기로 선택했을 때는 해악의 리스크가 제로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는 해악의 리스크가 아무리 크더라도 마음대로 리스크를 부담해도 됩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상당한 해악의 리스크를 강요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히 타인에게 위험을 강요하는 그 행위가 (완벽하게 회피할 수 있고) 필수적인 것이 아닐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동의의 문제와 관련하여서,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행위로서의) 출산은 태어남을 당하는 자에게 명시적이고 직접적이며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이 점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누군가를 위해 좋은 선택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이런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자녀라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몇 개월씩 그 생명을 위해 준비를 할 것입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생명을 위해서도 의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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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행동하는 것이에요.

‘신이 된 양 행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표현은 타인의 삶이나 기타 자신과 상관없는 일들을 통제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어서 힘을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주로 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변명은 ‘신이 된 양 행동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개인이나 집단이 타인에게 개입하여 아주 끔찍하고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사례들이 물론 많지만, 반대로 매우 긍정적인 사례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산속에서 조난당해 굶주린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했을 때, 그 사람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하는 것이 ‘신이 된 양 행동’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때 ‘신이 된 양 행동’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러한 사건들이 이미 벌어지고 있으므로 그저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이를 통해 우리는 ‘신이 된 양 행동하기’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신이 된 양’ 행동하느냐입니다.

둘째, (이 변명에서 암시되었듯) ‘신이 된 양 행동하는 것’이 나쁘다고 합시다. 이때, ‘신이 된 양 행동하는 것’은 출산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출산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 ‘신이 된 양 행동’하는 것인가요? ‘신이 된 양 행동’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어떠한 공간에 존재하고 당신이 그 생명의 출생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출산은 말 그대로 타인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일, 즉 그 사람을 만들어내는 행위입니다. 출생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당신이 만들어내는 것은 당신의 삶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된 양 행동하기’입니다. 반출생주의는 그 반대입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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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지는 모든 사람을 막을 수는 결코 없을 거예요.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아이를 가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실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며 인간의 도덕적 진보에 현실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출산과 관련해서는 판도라의 상자가 이미 열렸고 아마도 상황을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반출생주의 운동은 아마도 최종 목표(반출생주의자들 개개인이 생각하는 최종목표가 다르기에, 그 최종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였을 때, 이 변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1.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아예 손을 놓아버리고 부분적 해결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상황에 적용해 보면, 이 변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어쨌든 굶주리는 사람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굶주림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굶주림에 대해 아예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이유로 제시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당연히) 웃음거리가 되고 방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2. 이것은 해당 문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여도 그 문제의 규모나 심각성을 높이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제시한 것과 동일한 예시를 반복하자면, 누군가가 “어쨌든 굶주리는 사람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굶주림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굶주리는 사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음식을 보내지 않을 이유(혹은 변명)로 삼는다고 합시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고 방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34

모든 사람이 입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입양은 비용이 많이 들어요.

이 변명에는 잘못된 이분법이 들어 있습니다. 이 변명은 입양이 아니면 곧 출산하는 것만이 선택지라고 가정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아이를 반드시 키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것이죠. 당신이 아이를 원하는 경우에도 (그런데 어떤 이유로든 입양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이 곧 아이를 낳아도 된다는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합리화’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유정적 존재를 죽여서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써 ‘대체식품(예: 식물 기반 육류, 식물성 유제품)을 먹기 싫어서 (혹은 먹을 수 없어서)’를 대는 ‘정당화’와 유사합니다. 미안하지만, 어떤 욕구가 윤리적 수단을 통해 충족될 수 없다면 (아니면 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편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구 중 일부가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자에게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반출생주의자)가 이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냉정해서는 안 되지만, 단호해질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좋습니다. 이 변명이 제기하는 당장의 문제를 다루어봅시다.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더 비용이 많이 들까요? 임신 기간의 중 의료비나 식료품비, 그리고 출산에 수반되는 경제적 부담 등 생물학적 부모되기에만 해당하는 비용도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각자의 상황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각자 어떤 입양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이미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은 어떤가요? 삶의 조건은 어떤가요? 아이를 같이 키울 파트너가 있나요? 입양하면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나요? 이러한 요인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어떻게 발현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마도 누군가에게 실증적인 대답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본 대답의 첫 단락에서 그러했듯이) 논의의 범위를 이론적인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출생에 관한 윤리적 논의의 핵심과는 관계가 없는 경험적 측면에 대한 논의 와중에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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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혼자서 아이를 가지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설교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것은 출생을 옹호하는 변명이라기보다는 출생이 함의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비판적 관심을 가질 책임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여태껏 가져왔던 세계관의 근본적인 부분인 출생이 윤리성에 반대되는 논증/정보/관점을 접하게 된 것이고, 이것들은 아마도 자신이 계획했던 일(자녀를 갖기)이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반출생주의 도덕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형태의 도덕적 진보 운동과 같은 이유입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노예제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종차별 법률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이러한 대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덕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설사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출생주의는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중립적인 비행동 운동입니다. 단지 하나의 문제(사실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죠. 만약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고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반출생주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질문은 간접적으로 매우 타당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반출생주의적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방법도 고려해야 합니다. 대다수 사람은 이미 반출생주의 메시지를 극단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반출생주의자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 메시지에 대해 아예 귀를 닫아버릴 법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반출생주의적 대의를 효과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본 핸드북과 같은 소책자에서 간단히 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반출생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통해 알아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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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멸종해도 우리가 사라진 후 다른 문명이나 종족이 어딘가에서 나타날 거예요.

물론 어딘가 문명이나 유정적 생명체가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야생동물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이 계속 생존해야하는지에 대하여 논쟁이 있고, 마찬가지로 외계인의 윤리적 문제를 잠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계속 생존해야 한다는 내용의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에 관해 논의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과 지구 밖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생명체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1) 우리는 지구상에 고통받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 존재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2) (만약 지구 밖에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해도) 외계의 유정 생명체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진보(즉, 수 세대에 걸쳐 이룩해야 할 기술 진보)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변명의 논리를 실제 의도된 바대로, 즉 (이타적으로 다른 존재를 돕기 위함이라는 관점 없이) 출생에 대한 정당화 문제로만 다루어 봅시다. 이 논리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요약됩니다: 다른 장소나 시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거나 혹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 똑같은 논리가 다른 어떤 것에도 사용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예컨대 제가 “왜 이 어린이를 그만 학대해야 하나? 다른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다른 시간에 다른 아이를 학대할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예, 지금 내가 나쁜 행동을 하고 그 나쁜 행동은 다른 사람에 의해 다른 장소나 다른 시간에 자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그 나쁜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우리 집 문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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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쁜 면 없이 좋은 면만 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변명은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부정적인 것들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혹은 이렇게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이유로,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경험하는 데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애초에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존재 ‘인간’이 긍정적인 것들을 경험하는 데 관심이 없다면, 긍정적인 것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부정적 경험을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나요?

이 변명이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무시하는 것은, 삶이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이용해서 하는 러시안룰렛 게임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에는 긍정적인 경험도 있고 부정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감히 체임버를 돌리고 리볼버의 총신을 다른 사람의 머리에 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감히 ‘단지 긍정적 경험을 많이 주려고 한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가며 타인을 고통으로 밀어 넣는 행위를 저지른 후 책임을 회피하려 할 수 있나요? 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잠재적으로 엄청난 고통으로 밀어 넣는 무책임하고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른 다음, 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삶은 행복과 관련된 위험과 타협의 연속이지만, 이러한 위험과 타협은 그 누구도 스스로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낳는 것은 것은 고통이 내재된 어떤 프로그램에 그 자녀를 등록시키는 것입니다. 고통이 내재되어 있지만 일단 등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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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나쁘다고 단언할 수 없어요. 삶의 가치는 각 사람이 판단할 문제예요.

이 변명은 삶의 지속과 출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변명은 자기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니까 삶이 나쁘다(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태어나고 난 후에는 자기 삶이 가치 있는지 아닌지 각자가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출생이 (그리고 이를 통해 살 만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의 문제는 이것과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관건은 새로운 유정적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윤리적이냐(물론 더 많은 뉘앙스가 있지만, 일단은 무시함) 하는 문제입니다. 일부 사람이 혹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주관적으로 자기 삶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주 낙관적으로 생각해서, 99%의 사람들이 자기 삶이 가치 있다고 평가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떠한 생명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낙관적 시나리오 내에서도 출생한 자 중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삶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사실 고통으로 가득했다고 평가할) 1%에 포함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감히 고통스러운 새 생명이 입을 부수적 피해를 인지한 채, 유정적 생명체의 지속적 출생을 지지하거나 이를 자행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삶을 고통스럽게 평가할 사람이 전체 중 고작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내릴 99%의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출생할 필요도 없고 출생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99%가 불행한 1%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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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출생을 그만둔다면, 인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우리 조상들의 희생이 모두 무의미해져요.

이 변명은 흥미롭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변명은 조상들이 인류의 존속을 위해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것에 빚을 진 우리도 인류를 지속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우리 조상은 죽어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자동차나 인터넷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존속할지 어떨지 인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모릅니다.

둘째, 이 변명이 암시하는 바는, 우리의 조상들이 어떠한 형태의 위대한 업적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많은 사람이 위대한 일을 했으며 타인의 삶을 개선했습니다. 이러한 업적은 인정되어야 하고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를 지속하는 것 그 자체는 사실 업적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십억 명의 인간(그리고 수조 마리의 다른 동물들)이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는데, 이를 생각하면 우리는 시체 더미 위에 서서 ‘보아라 내가 아이폰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자의적인 위치에 서 있습니다. 출생을 통해 우리가 하는 것은 단지 존재할 필요가 없을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뿐입니다. 물론, 지금 태어난 사람은 (다양한 요인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지만) 200년 전에 태어난 사람보다 고통이 덜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현대인의 필요는 우리 조상보다 더 많이 충족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필요 그 자체가 애초에 존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므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에 수반하는 모든 리스크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필요는 위험한 것입니다.)

셋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이미 지구의 생태계에 너무 큰 충격(예: 인위적인 기후 변화)을 주었고 이것만으로도 벌써 인류는 스스로 멸종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이 정말로 (그들의 조상이 많이 희생했기 때문에) 인류 존속에 관심이 있다면, 지구 생태계 파괴에 인류가 기여하는 정도를 줄이기 위한 방도로서 어쨌든 출생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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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갖지 않는 것은 하나의 유행일 뿐이에요. 다른 유행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사람들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이 변명은 출생을 선택하고자 내세우는 변명이라기보다는 출생을 윤리적 문제로 보는 시선 자체를 깍아내리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반출생주의를 최신 전자오락과 같은 유행으로 폄하하는 것은 근거가 없고 경솔한 인신공격입니다. 이런 식의 인신공격은 진지한 윤리 운동(예: 자유주의 페미니즘, 동물 권리 운동)에도 똑같이 가해질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가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변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근거 없는 주장을 무시하는 데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 주장을 살펴봅시다! 반출생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천 년이 넘게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의 예로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Abū al-ʿAlāʾ al-Maʿarrī)는 973년에서 1057 사이에 살았던 반출생주의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명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지었으나 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짓지 않은 죄다.”

반출생주의 사상이 이토록 오랫동안 존재해 왔으며 최근 몇 년 동안 반출생주의자들이 더 많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반출생주의는 하나의 유행이라기보다는 앞으로도 지속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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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천국에서 아이와 함께 있고 싶어요!

이러한 변명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최대한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논의를 시작합시다. 천국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갔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원할 것이라는 점은 이해가 됩니다. 그들이 놓치는 것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즉, 출생)이 잠재적으로 엄청난 양의 부수적 피해를 남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부수적 피해일까요? 누군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겪을 수 있는 모든 공포를 생각해 보세요.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디뎠을 때 지옥(아마도 천국을 믿는 사람의 세계관에는 지옥도 있을 것입니다)에서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두말할 것 없습니다.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출생은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겠다고 다른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려서 까딱하면 가장 고통스러운 실존의 장소라는 지옥에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출생하지 않는다면 지옥에 갈 일도 없습니다. 낳음을 당하는 아이 앞에 당신은 극심한 고통을 피하고자 (최악의 상황) 혹은  부모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의 상황) 극복해야 할 일련의 시련(상세 내역은 신앙하는 종교에 따라 다름)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때로 어떤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누군가를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겠다는 신념이 그토록 강하다면 언제라도 입양이 하나의 선택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독실한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입양 대상 아이는 분명 이미 지옥에 갈 위험에 처해있을 것이므로, 이 아이를 입양하여 ‘천국 길’로 인도하는 편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아이를 낳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미 잠재적 희생자를 (어쨌든 독실한 사람들의 눈에는) 구원할 기회가 있는데, 왜 잠재적으로 지옥에 갈 위험(그리고 지구에서의 고통)을 경험할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나요?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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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다른 집단이 우리 자리를 대체하고 지배할 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명은 까다로운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반이 사실 출생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타 집단에 대한 의심이나 혐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출생은 다른 집단의 지배를 종식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습니다. 이때 피아 집단을 나누는 기준은 종교, 민족, 교육 수준, 경제적 지위 등이고 다른 어떤 요인으로든 집단을 나누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명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기저에 가지고 있는 타 집단에 대한 의심을 건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언급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1. 출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집단은 자발적인 요소(예: 사고방식, 행동, 취미 등)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구성원들이 될 것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들의 경우, 생물학적 자녀를 만들어 내는 것은 구성원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고 효율적인 방법도 아닙니다. 사실,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낸 다음 이렇게 태어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비해서)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2. 출생이 집단의 번영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당신의 선례를 따라서 이런 자발적 집단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3. 입양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아동이나 (혹은 그 누구든) 정치 놀이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되고, 설령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기 쉽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자신의 집단으로 들어오도록 설득하는 데 있어서) 입양 역시 새로 아이를 낳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불확실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입양이 가지는 추가적인 ‘이점’은 그 아이를 다른 집단의 영향력에서 보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아이의 환경을 더 잘 제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물론 일부 집단(예: 인종 집단)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가입하거나 탈퇴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새로운 구성원을 얻는 방법은 출생뿐입니다. 따라서 사실 이 경우,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이 가진 타 집단에 대한 불신 문제 자체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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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존재가 낫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러한 변명은 우리가 한 가지 상태(존재)에 대해서만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상태(비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어쩌면 몹시 나쁜 상태(비존재)로부터 생명을 구조하는 것이 출생일 수 있기 때문에 출생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 주장은 (어떤 상태에 대해 아느냐 모르냐의 문제와 관계없이) 간단히 뒤집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출생은 아주 나쁜 상태(존재)로 밀어 넣는 행위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비존재 상태에 두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핑계 그 자체로 돌아와서, 이 변명은 아래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우리는 두 가지 모두 대응할 수 있습니다:

  1. 비존재는 그 자체로 나쁘다. 이러한 형태의 변명은 비존재가 무엇인지에 관한 혼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존재는 단지 어떤 것이 부재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비존재가 그 자체로 나쁘려면 그것을 경험했을 때 싫다고 여겨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경험되기 위해서는 경험을 하는 주체가 존재해야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미 비존재가 아닌 게 됩니다.

  2. 존재는 비존재보다 상대적으로 낫다. 존재와 비존재를 비교해 봅시다.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존재는 두 가지 중요 구성요소를 가집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 (즉, 좋은 것) 그리고 우리가 선호하지 않는 것 (즉, 나쁜 것)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비존재에는 나쁜 것이 없고 그것은 좋습니다. 비존재에는 좋은 것도 없습니다만, 그걸 아쉬워하거나 원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비존재는 필요나 욕구를 강요하지 않으므로, 아프거나 불만족 상태에 처하지 않게 됩니다. 사실 모든 나쁜 일들은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비존재는 이 모든 것을 제거합니다.

토마스 리고티(Thomas Ligotti)는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비존재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존재는 모두를 아프게 한다.”

여기에서 비존재는 태어난 적이 없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미 태어난 사람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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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출생주의는 반여성적이고 반페미니즘입니다. 어떻게 감히 여성에게 자기 신체로 어떻게 해라 하지마라 말할 수 있나요.

이 변명은 본질적으로 ‘내 개인적인 선택’ 변명과 동일합니다만, 여성주의적인 측면이 가미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변명은 반출생주의가 여성에게 자기 신체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왈가왈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은 자기 신체에 대해 개인적인 선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구성 요소를 다루어 봅시다. 반출생주의는 여성에게 자기 신체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출생주의는 단순히 여성들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자기 행동(특히 출생)이 가져올 윤리적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구성 요소를 다루어 봅시다. 맞습니다. (성별을 무관하고) 누군가가 자기 몸으로 어떻게 하든 그것은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출생의 경우 타인의 신체도 관련되며 바로 이것 때문에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 몸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당신의 몸을 이용하여 타인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태어난 생명을 가지고 도박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선택의 범위를 넘습니다. 타인이 관계된 선택이며 따라서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윤리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또 다른 지점은, 반출생주의가 여성에게 오히려 큰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 여성은 임신 중 모든 고생을 혼자 짊어지게 되고, 출생 후에도 (옳건 그르건) 대부분의 육아가 여성의 몫입니다. 아이가 없다면 아이를 키우는 데 사용할 시간과 에너지를 여성이 원하는 아무 일이든 그 일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가지는 것은 여성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제약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성이 직면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반출생주의가 유일한 실질적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출생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존재함으로써 경험하게 될 고통, 차별 그리고 통제의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출생주의는 페미니즘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 때문에 고통받는 세상에 더 이상의 피해자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므로, 페미니즘에 힘을 보태는 것 같습니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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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출생주의는 종교이자 컬트에요!

이는 출생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라기보다는 반출생주의를 아주 극단적이고 이상한 사상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반출생주의 지지자들이 무슨 말을 하건 귀를 닫은 채 스스로 만족하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세계관에 도전이 되는 것에 직면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변명을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출산이 비윤리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오버톤 창)를 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혹은 이전에 접했던 반출생주의자가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마음속에서 ‘종교’ 혹은 ‘컬트’라는 꼬리표를 반출생주의자들에게 붙여버리고는 이어서 그 꼬리표가 반출생주의 철학 그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전이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반출생주의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고 느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많은 종교가 신도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과 같이 말이죠. 다른 윤리적 원칙과 마찬가지로 반출생주의는 물론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모든 반출생주의자가 개인에게 추구하는 것은 각자가 자신이 하는 출산이라는 행위나 출산을 지지하는 행위가 어떠한 윤리적 함의를 가지는지를 숙고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윤리적 질문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예컨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내가 죽이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희열을 느끼기 위해 타인을 죽여도 되는가? 상대가 싫다고 하는데도 섹스해도 되는가? 와 같은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타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사실 단순히 누군가의 행위가 윤리적인지 질문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과 대화할 때 제가 주로 취하는 방법은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이 컬트적인가? 일부 반출생주의자들의 행동을 반출생주의 철학 그 자체와 혼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변명은 출생에 관한 핑계가 아니기 때문에 눈앞의 실제 논쟁으로 대화를 되돌리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이 변명은 그냥 헛소리입니다.

#46

자녀를 가지지 않으면 제가 죽은 후 어떻게 계속 살 수 있죠? 제 유산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유전자를 남겨야 해요.

이 변명과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부분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런 것을 열망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목해야 할 두 번째는 기억되기 위한 수단으로써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변명은 이기적일까요? 유산을 남기고자 하는 것 자체는 이기적이기 않지만(약간 자기중심적일 수는 있음), 이를 위해 누군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당신의 유산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어떤 사람을 만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태어난 사람에게 당신의 유산도 의존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위험의 길로 내모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매우 악한 일인데, 거기에 더하여 당신의 유산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당신의 정한 기대치에 부합한 삶을 살도록 타인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더 나쁜 일입니다. 당신의 유산의 중심이 되고 싶다고 요청한 적도 없는 누군가를 만들어냈지만, 그 사람은 1) 자신의 욕망과 상관없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감정적 부담을 견뎌내거나 혹은 2)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갈 건데, 후자의 경우 사람 간의 차이를 고려했을 때 아마도 ‘당신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과 완전히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입양은 입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입양되는 사람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만, 누군가가 꼭 타인을 통해서만 유산을 이어갈 수 있다고 했을 때, 굳이 출생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입양이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왜 이 변명은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자녀를 가지고 있지만 또 대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힙니다. 타인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더 기억에 남거나 (혹은 덜 잊히거나) 할까요? 당신의 자녀가 위대한 일을 달성하더라도, 유명인의 부모가 기억되나요? 아니요.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유명한 경우는 부모 자신이 스스로 유명한 이유가 있을 때입니다. 기억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타인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거나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거나, 혹은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기억됩니다. 본인의 유산이 남겨지기를 원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잊힐 또 다른 이름 없는 이를 만들기보다는 타인을 도와서 스스로 기억될 유산을 만드는 편이 낫습니다.

#47

당신의 생각은 너무 흑백논리에 빠져있어요. 당신은 너무 절대주의적이에요. 출생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여타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출생의 윤리에도 미묘한 뉘앙스들이 있습니다.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처럼 출생에 대한 반대 일체를 마치 현실의 뉘앙스에 무지한 경직된 이데올로기처럼 치부하려고 하려는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이 만난 유일한 반출생주의자가 경직된 사상가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반출생주의자가 경직된 사상가인 것은 아닙니다.

반출생주의 윤리라는 주제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그 세부 사항에 있어서 이견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흑백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조차 없는데 어떻게 출생에 대한 전반적 반대 그 자체가 ‘흑’이라거나 ‘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 사람이 인류 전체의 고통을 종식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반출생주의자는 그 한 사람을 출산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혹은, 인생에 행복한 쾌락만 있고 고통이 전혀 없다면 이 상황에서는 자녀를 낳아도 될까요?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일부 반출생주의자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고,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산하는 것은 우리가 (부모로서) 내킨다는 이유만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고통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일 따름입니다.

더 나아가 아동 납치, 성폭행, 고문 등 많은 사람이 분명히 하나의 절대주의적 입장을 가질만한 문제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한테는 ‘흑백논리에 빠져있다’고 하지 않을 것인데, 출생에 반대하는 문제에 관해서 유독 반출생주의자들은 ‘흑백논리에 빠져있다’라고 말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더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할 사안을 (아마도 무의식적이겠지만) 무시하는 싸구려 방식인 것처럼 보입니다.

#48

삶은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기회입니다.

이 변명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지점에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다룹시다: 1) 삶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2) 삶은 기회이다.

우선 삶이 강요된 것인지 아닌지부터 시작해 봅시다. 삶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필요의 전달체이기 때문에 삶은 우리가 충족시켜야 하는 필요들의 연속입니다.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결과로 우리는 고통으로 경험합니다. 이러한 필요(음식, 물, 쉼터, 온기 등)는 각각 적극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며, 이를 방치하면 굶주리거나 갈증으로 죽거나 비바람에 노출되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내재적인 특성 상 가진 욕구를 충족할 수단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운이 좋으면) 확보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필요 중 어떠한 것도 충분히 충족될 수가 없기에 우리는 항상 다시 배고파지고 다시 목이 마르고, 항상 다음 형태의 오락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죽음이 이를 해소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죽음은 (비록 우리의 필요가 끝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무서운 미래입니다. 이 상황으로, 이 곤경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집어넣기로 결정합니다. 우리가 벗어날 수 없고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방도도 없는 필요의 연속으로 정의되기에 삶이란 진정으로 강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삶이 기회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봅시다. 무엇을 위한 기회인가요?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인생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 위한 기회!”라고, 간단히 말해서 좋은 것들(경험했을 때 더 원할 것들)을 경험할 기회가 바로 삶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창조하여 쾌락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기회”라고 부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존재가 그러한 쾌락을 경험하기를 원할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것을 경험할 능력(그리고 욕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출생으로 인해서만 존재합니다. 애초에 x를 원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인데 누군가에게 그 x를 주는 것을 그것을 기회라고 부르는 것이 말이 되나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49

고통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에요. 많은 이들이 나쁜 것을 경험함으로써 성장했어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개인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고통 자체를 정당화하거나 고통을 좋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학대를 당한 사람은 그 끔찍한 경험을 원동력으로 삼아 다른 많은 학대 피해자를 도와주는 자선 단체를 설립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학대당한 그 사람은 이러한 자선 단체를 설립하고 다른 학대 피해자들을 도와주는 데에서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 사람이 애초에 당한 학대를 정당화하거나, 그것을 좋은 일로 만들어 주나요? 물론 아닙니다. 처음의 학대는 여전히 잘못된 것이며 끔찍한 경험입니다. 해당 피해자가 그 경험으로부터 괜찮은 미래를 일구어내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는 것은 극도로 행운입니다.

그 사례나 혹은 다른 사례들에서도 고통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전히 확신하시나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사람은 당신 자신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과 동일한 경계, 능력, 혹은 관용을 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기억하세요. 심각한 고통(즉 존재)에 놓이게 될 것으로 보장된 상황으로 다른 사람을 집어넣어 버리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단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통을 부담시키고 나서, 이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타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성장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정말 나쁘지 않은 것이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고통 뒤에 무엇이 오든지 간에 고통은 그냥 고통입니다.

#50

우리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저 몸을 사리며 살 수는 없어요. 삶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에요!

이 변명이 암시하는 것은 반출생주의가 위험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개인의 행동에 불합리한 제약을 가한다는 것과 반출생주의자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나쁜 일들을 걱정하며 옷장 속에 숨어 벌벌 떨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혼동에서 온 것입니다. 반출생주의는 이미 태어난 사람(즉, 벌벌 떨 수 있는 사람)이 경험하는 위험의 리스크를 줄이는 것과 관련이 없습니다. 반출생주의는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생명이 애초에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일단 존재하게 되면, 우리는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현실을 헤쳐 나가고 자신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를 조율하며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나가는 것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으로서 우리의 해야 할 몫입니다. 반면에 출생은 애초에 어떠한 리스크에도 노출될 필요가 없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 다음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잠재적 고통과 확정된 고통의 지평을 똑같이 헤쳐 나가야만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고 (분명히 말하건대 몸 사리며 사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원하는 만큼 리스크를 부담시키며, 할 수 있는 만큼 성취를 이룩하세요. 그러나 타인의 안위를 가지고 야바위 놀이를 하지는 마세요. 비존재는 주체가 존재한 후에야 경험할 수 있는 쾌락에 대해서 욕구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리스크를 부담(특히 쾌락의 역량이 고통의 역량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리스크로 귀결되는 상황에서)해야만 하는 주체를 왜 만드나요?

반출생주의 견해를 가지는 것을 ‘몸 사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반출생주의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이, 개인의 행동(즉 출생)에 불합리한 제약을 가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출생이 너무나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타인을 태어나게 만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따라서 반출생주의가 그 권리를 자신들로부터 빼앗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불합리한 것은 많은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모하게 출산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페테르 베셀 삽페(Peter Wessel Zapff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전은 심사숙고 후에야 거지에게 주어지지만, 아이는 고민 없이 잔혹한 우주에 내던져진다.”

#51

 일단 우리가 쾌락의 순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면, 우주 전체의 쾌락 총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출산하는 것이 분명 좋은 것 아닌가요?

이 변명의 주창자는 현재 가능한 (혹은 실제) 삶의 질의 범위가 출생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 내릴 만큼 좋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만약 인간이 윤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출생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출생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할 수 있을 수준으로 삶의 질의 범위가 도달할지도 모른다고 가정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계속 진행합시다.

이 변명은 (어떻게 정의되든지 간에) 쾌락이 좋은 이유는 유정적 존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쾌락이 좋게 만드는 두 가지 요건은 1) 존재 그리고 2) 그 존재가 주관적으로 경험할 능력을 가짐 입니다. 쾌락의 양이 합산되거나 처리되거나 계산되는 중앙 우주 계산기 같은 곳은 없고, 각각의 유정적 개인이 쾌락을 주관적으로 경험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쾌락의 총량 증가는 누구에게 좋은가요? 물론, 누군가의 쾌락이 증가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좋습니다. 하지만 (존재가 만들어지기 전의) 비존재는 위의 두 가지 요건 중 어떠한 것도 충족하지 못합니다. 쾌락의 증가로 누군가가 이득을 보려면 그 누군가는 이미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태어나야만 필요하거나 원할 경험을 이유로 새로 사람을 태어나게 하자는 것은 비상식적인 목표처럼 보입니다. 이는 마치 은퇴 후 여생을 즐겁게 보내게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즐거운 여생은 물론 은퇴하고 싶은 욕구도 없습니다. 새로운 유정적 존재를 만들어내서 그들이 쾌락을 경험할 수 있게 하겠다는 노력의 방향을 바꾼다면,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은 정말 삶의 질을 향상하고 싶어 합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정말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도덕적 선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도덕적 선을 달성하기 위해 직접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자녀 한두 명을 키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녀 양육은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자원을 써야 하는 상당히 비효율적이며 기회비용이 높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직접 자신의 아이를 키우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출산을 권유하는 방식을 통해, 출산에 거부감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자원 집약적인 일을 아웃소싱할 것입니다. 이들은 효과적인 친출생주의 자선단체에서 봉사하거나 이 단체에 기부하는 방식을 통해 이러한 노력을 할 수 있으며, 정부에 친출산주의적 로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직접 친출생주의 교육 지원 단체를 설립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러한 활동을 하거나 심지어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했을 때, 이 변명은 실상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감추기 위한 ‘이타적인’ 위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2

야생동물의 고통이 확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출산해야 해요.

이 변명은 다른 생명의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주장은 잘못된 이분법을 제시합니다. 이 주장이 제기하는 이분법은 1) 인간이 출산 (혹은 더 많이 출산) 하지 않으면 2) 야생동물이 겪는 고통의 범위(그리고 아마도 강도 또한)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 두 가지 가능성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논의를 위해서 인간 활동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인간 및 비인간 동물의) 고통이 통제되고 더 적은 고통이 발생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물론 항상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봅시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 활동에 따른 고통의 절감이 필연적으로 출생으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기술 능력과 지식 저장량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야생동물의 고통을 없앤다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인간의 육체가 수단으로써 필요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참고: 야생동물의 고통(혹은 다른 형태의 고통)을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과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현저히 적은 숫자의 개체로 인류가 지속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관한 논의가 반출생주의자들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커뮤니티와) 현재 진행 중입니다. 현저히 적은 숫자로 인류가 지속되는 이러한 궁극적인 상황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출생이 필수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무분별한 수준에 미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출생률이 극도로 낮아지는 상황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출산을 옹호하는 논거로써 적절하지 않습니다.

둘째, 야생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출생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이는 너무 거칠고 투박한 수단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발생하는 고통에다가 그 인간이 의도적으로 다른 동물에 가하는 불필요한 고통을 더한 다음, 그 인간 본인이 겪는 고통까지 고려했을 때, 출생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는 너무 우회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유정적이지 않은 유기체나, 도구, 혹은 사물을 이용하는 것이 유정적 존재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방법으로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비록 현재 우리가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출생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기보다는 그러한 역량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 지점에 관해 마지막으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든 유정적 존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해야 하며, 일반적으로 권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변명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야생동물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적은 지역에는 이 변명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막, 남극 혹은 우주와 같이) 유정적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역에 정착지를 설립하는 것은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인 고통 절감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착지는 원래 고통이 없던 곳에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거나, 고통이 적었던 곳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3

출생에 대해서는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생명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에너지가 우주를 통해 순환하는 과정입니다.

이 변명은 매우 독특하지만, 때로 더 진전될 수 있는 변명입니다. 이 변명이 독특한 이유는 에너지 이동이라는 아주 특정한 렌즈를 통해 출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이동은 출생의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유의미한 관련성도 없습니다. 반출생주의에서 새로운 사람을 태어나게 만드는 것을 둘러싼 논의는 윤리적인 논의입니다. 누군가가 출생을 그것의 구성 요소인 생물학, 화학 그리고 물리학으로 나누고 싶다면, 그렇게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반출생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논의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에너지 이동을 도덕적 판단이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한다면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모든 행동은 (우리가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에너지의 이동을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에는 일이 필요하고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변명은 내세우는 사람들은 정말로 강간범, 학대자, 살인범을 비판할 권리도 스스로 포기하고 싶은 것인가요? 심지어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할 때 그 폭행범을 도덕적으로 판단할 권리까지 포기하고 싶은 건가요? 그들이 희생자가 되는 모든 행동 역시 ‘단지 에너지가 흐르는 또 다른 방식’이지 않겠습니까?

#54

유정적 생명을 만들어낼 때 득보다 실이 더 많은지 알 수 없으므로 출생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 불가지론적이어야 합니다.

대체로 이 변명은 출생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이러한 변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출산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중 어떤 것이 더 큰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이때 출산의 긍정적인 면에는 (일부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출생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고, 당사자 외부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부분(즉, 친척이나 친구들에 대한 이득, 사회가 기능하는 데 기여하는 것, 야생동물 고통을 줄이는 기능 등)이 있고, 부정적인 면에는 출생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부분(즉, 출생된 사람이 고통받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당사자 외부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부분(즉, 출생된 사람이 타자에게 가할 고통)이 있습니다. 이 변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공리주의의 저울로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누군가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모르므로, 어느 쪽으로든 (즉, 출산하든 하지 않든) 판단을 내리지 않는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기로 결론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윤리적 불가지론, 즉 어떤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알려진 당사자 모두에게 미칠 영향을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확정하기 전까지는 윤리적 판단을 미루어야 한다는 입장은 겉보기에는 불합리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응용 윤리 자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이 변명을 제기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온당하게도)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문제에 이것을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비인간 유정 생물을 살상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목초지에서 소를 키우려면 많은 땅이 필요합니다. 소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고통받는 야생동물들이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초지에서 소를 목축하고 살상하는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불가지론적 태도를 유지하여야 하나요? 유정적 생명체인 소를 칼로 찌르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윤리적 판단도 내리지 않고 그저 그들을 내버려 두어야 하나요? 만일 소가 길고 즐거운 삶을 살았고, 살상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면 어떤가요? 게다가 소의 사체를 팔아서 모은 돈이 다음 세대의 송아지를 양육하는 데 사용된다면 어떤가요? 목초지를 만듦으로 인해 없어진 모든 야생동물의 고통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고통에 관심을 가지겠다고 선언한다면 특정 행동이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변명에서 내세우는 수준의 도덕적 불가지론이 윤리 그 자체에 대해 냉담해지도록 만들게 두지 말고, 타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포함하여, 우리가 그 자체로 잘못이라 생각하는 행동을 최대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습니다. 야생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소의 목을 베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음이 분명한 것처럼, 기존의 생명이 직면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유정적 생명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야 합니다. 고통을 줄인다는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수단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윤리적 불가지론은, 출생을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명시적이며 심각하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자 그들의 죽음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관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지점이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55

출생은 태어나는 아이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출산을 통해 타인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사회가 더 나아지는 거예요.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이득이 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한 생명을 만들어낼지의 문제에서, 이 생명을 낳는 당사자들은 때때로 이 출산 행위 자체로부터 매우 큰 의미와 성취감을 얻을 수 있으며, 나이가 들고 나서는 자신이 낳은 생명으로부터 육체적, 재정적 지원 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생명의 출산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 역시 이 출산 행위로부터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난 생명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태어난 생명이 자라나서 공급망, 기관 및 기타 구조(예를 들어, 어학원이나 의료 시스템)에 기여하면 그것으로부터 간접적인 혜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혜택이 (고통받고 죽게 될) 누군가를 창조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나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은 유정적 생명을 수단으로써 쓰고 있더라도 현 상황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만두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인(특히 무고하고 연약한 사람)에게 심각한 고통과 죽음을 강요해도 괜찮은 것인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기 행동이 가지는 윤리적 결과에 대해 항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사회 전반의 구조는 무지와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위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결국 사람들은 종종 자기 행동이 가지는 윤리적 책임을 면합니다.

#56

 출생에 반대하는 것은 잠들어 있거나 혼수상태인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변명(사실 변명이라기보다는 반출생주의에 대한 비판에 가깝지만)은 반출생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코마 상태의 사람들의 생명을 끝내기를 원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변명이 지적하는 지점은, 유정적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반대가 논리적으로는 유정적 생명체의 의식이 일시적으로 억제된 상태(예를 들어 잠들어 있을 때나 코마 상태일 때)에 그 생명을 끝내는 것을 지지하는 결론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해입니다. 우연히 반출생주의자들 중 일부가 죽음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반출생주의 자체와 논리적으로 연관된 특정한 견해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변명에 답변하기 이전에,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왜 반출생주의가 이러한 죽음관을 함의한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이 변명에 대답하기로 결정했다면, 아래의 사항들이 유용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반출생주의의 핵심 기둥이 무엇인지 기본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유정적 생명체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에 반대하는 사상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에든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1)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현저하며 명백하게 고통으로 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2) 어떤 필수적이지 않은 결정이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명백하고 현저한 해를 끼칠 위험이 있으면 타인의 동의 없이 이런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입니다. 유정적 생명을 끝내는 것은, 의식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도 하더라도, 위의 두 기둥 모두를 위반합니다. 죽은 상태는 고통받을 가능성을 초래하지 않지만, 죽는 과정은 그러합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죽음의 과정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미친 짓입니다). 피해를 어떻게 정의하시든, 또한 죽음 자체를 피해로 보시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생명을 끝내는 것은 피해의 가능성을 야기합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끝내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로 결정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의식, 지각 그리고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며 그들이 좌절될 수 있는 욕망을 가졌는지 여부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비존재의 상황과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기 전의 사람은 태어나기 위한 무슨 대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존재하지 않는 것일 따름입니다.

또한 의식이 제한된 상태의 사람 역시 다른 사람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수상태에 있거나 잠든 상태의 사람에게는 자녀가 있을 수 있기에, 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 책임이 이행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 진행 중이던 일 중에 타인에게 이득을 주거나 타인의 고통을 경감할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을 죽게 되면, 다른 사람이 나서지 않는 한 이런 좋은 일들이 중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57

사람들은 당신의 생각보다 강인해요. 사람들은 삶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고통을 견딜 수 있어요.

네, 사람들은 강인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삶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더라도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삶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러한 고난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겠다고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구하지도 않은 고통으로 사람들을 정말 몰아넣어야 하겠습니까(특히 우리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강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낳는 사람들도 강인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강인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단순히 누군가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그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이 (혹은 겪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이 변명의 핵심은, 큰 해를 입다가 결국 죽게 되는 상황으로 한 사람이 타인을 밀어 넣으면서 “감당할 수 있겠지”라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때의 타인은 (존재하지 않으나 출산을 통해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일면식도 없고 함께 한 경험조차 없는 정말 타인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태어남을 당하는 사람이 누릴 삶의 ‘혜택’을 위함이라는데, 그 혜택은 태어남을 당하는 당사자가 존재하기 전에는 누릴 능력도 없고 누리고 싶은 욕구도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능력이나 욕구를 가질 생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8

타인의 고통을 막기 위해 내가 인생에서 이토록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기중심적인 이 변명은 고통의 방지와 고통의 창조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동은 새로운 사람을 출산하는 것이 의도적 행동이 아니라는 가정에서 나오는데 이 가정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출산을 의도적 행동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도록 성장 과정을 통해 배우지만, 그 반대가 오히려 참입니다. 다른 사람을 낳지 않는 것이 행동이 아니며, 사람을 낳는 것이 적극적 선택에 따른 행동입니다. 이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고통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자체를 새로 만들어내지 않는 것(육체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면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고통의 발생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고통은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발생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제가 직장에서 재미로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음으로써 “고통을 예방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올바른 프레임은, 내가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고통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변명 가운데 다루어야 할 다른 부분은 출산하지 않는 것이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 공감하고, 자기 삶의 중심에 있던 무언가(즉, 생물학적 자손)를 상실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점도 이해하여야 하겠지만, 우리는 단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출생은 희생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다른 윤리적 (비)행동을 희생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성적 욕망을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것을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므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사실 그들의 성적 욕망(이 경우)은 오직 비윤리적 수단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이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식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면 항상 ‘차선책’(새로운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측면에서)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입양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어린이(비인간 동물도 고려해 보십시오)가 태어난 후 안정적인 보호자 없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59

당신은 그저 인생에 대처할 줄 모르는 나약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강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모욕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 무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출생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반박한다는 정신으로…

이 맥락에서 “나약하다”라는 표현은 육체적 힘이 아니라 인생 속 다양한 시련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가 가질 수 있는 감정적 혹은 심리적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준으로나 혹은 그 어떤 기준으로나 반출생주의자 모두가 도매금으로 나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출생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회복탄력성이 스펙트럼의 형태로 존재하듯이, 반출생주의자 가운데 나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기에 '약한' 자손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출산 전에 그런 생각은 해보셨나요?) 반출생주의자들이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혹하고 불공평하며 끔찍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주의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종종 힘이 들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일종의 회복탄력성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반출생주의자들은 주변 친구들이 즐거운 목소리로 “나 임신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끊임없이 그 생명이 직면할 고통을 떠올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이처럼 반출생주의자들은 강인합니다. 그러나 반출생주의와 무관하게 모든 것이 그렇듯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스펙트럼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반출생주의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마음을 바꾸기 전까지는 실제로 아이를 갖기 원했고, 출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기도 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상충하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재의 강한 욕망에 반하는 방향으로 미래의 행동으로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60

가난한 사람의 출산을 막는 데 집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가 많은데 우리 부자들은 아이가 적잖아요!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은, 이와 같은 변명이 ‘실용적인 정책’ 제안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것을 희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변명은 자기 개인의 행동과 책임으로부터 화제를 돌리고 대신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시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참고: 먼저 반출생주의가 유정적 생명의 탄생 일체에 반대하는 사상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즉, 종교, 경제 혹은 인종 등등을 기준으로 한 생물종(호모 사피엔스)의 하위 집단으로 물리적으로 발현하는 유정적 생명체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당면한 주제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런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은 현대 인구통계학(출산율을 포함한 인구에 대한 학문)의 실증적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낡은 고정관점에 따라 이런 주장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 ‘가난한 사람들’을 언급할 때, 인구의 측면에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스키마는 인도, 방글라데시 혹은 중국과 같은 인구가 많은 중산층 국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의 출산율은 각각 2.18, 1.99 그리고 1.7명입니다[1]. 실제로 중국의 평균 출산율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낮습니다[1].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전에 먼저 그들의 인구에 관한 실증적 팩트를 점검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인구통계학적 지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수준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을 수 있으나, 여전히 세계 평균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평균 출산율을 가진 나라나 지역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나라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저소득 국가인 경우가 많습니다[1].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단순히 이러한 국가의 높은 출산율을 악마화하는 것이 윤리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높은 평균 출산율은 높은 영아사망률부터 효과적인 피임법에 대한 접근 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에 기인합니다. 이러한 원인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나 캠페인에 힘을 모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들 지역의 출산율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인구통계학은 흥미로운 논의 주제이지만, 많은 경우 출생에 개입하는 당사자의 윤리적 책임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만약 이 변명을 내세우는 사람이 자신의 출산을 위한 희생양으로 타인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생각을 다시 해보고 다른 변명을 내세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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